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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건륭제 마누라만 40명

애신각라홍력은 청세종 옹정제의 넷째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뉴호록 표 씨였다. 홍력은 강희 50년인 1711년에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홍력이 옹정제의 친아들이 아니라 그의 벗인 해녕부 사람 진B 씨의 아들이라도 한다. 마침 두 가문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동시에
태어나자 옹정의 비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것이다.
홍력은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총명함을 타고 났던 그는 여섯 살 때 배운 것도 기억할 정도로
어났다. 문무를 겸비한그는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었다. 강희제는 원명원에서

두 살의홍력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 해 그를 궁으로 데려와 키우도록 분부했다. 옹정 11년에 홍력은
화석보친왕슬포에 봉해졌다. 옹정 13년 8월, 옹정제가 서거하자 그의 유조에 따라 홈력이
보위를 이었다. 그해 9월, 홍력은 태화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연호를 건륭 이라 정하면서건륭제라
불렸는데, 당시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건륭제는 60년간 재위하다 여든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호방한 성격에 풍류를 즐기던 건륭제의
후궁전에는 미인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비빈들과 황자, 황손을 합하면 가족이 백 명이 넘었다. 어질고
제는 황제 즉위 후 생모인 뉴호록 씨를 승경황태후뿌로츠음로 존숭시키고 여러 효성이 깊었던 건릉은 아름다운 칭호를 내려주었다. 또한 건륭제는순행을 나갈때 마다 항상 어머니와 동행했다. 숭경황태
후의 쉰 살 생일때는 성대한 연희를 열었고 이후로 건륭 43년에 숭경황태후가 죽을 때까지 5년, 10년에
한 번씩 축하 의식을 가졌다.

건륭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는 비첩 십여 명을 거느린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25살에 황제가 된
이후에 후비들이 점차 증가하여 직위를받은 사람들이 40여 명에 달했다. 한족, 만주족, 몽골족, 희족을
포함하여 명문 귀족부터 평범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심지어 죄인신분인 여성도 있었다. 옹정 5년에 건륭제의 비로 간택된 그녀는당시 그보다 한 살 어린 열여섯 살이었다.인자하고 총명 둘을 낳았다. 이후 그녀는 건릉
하고 아름다웠던 효현황후는 건릉제의 종애를 받으며 황자 둘과 황녀과 영경치이 건륭 3년과 12년에 각각
2년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낳은 두 아들 영련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은 몹시 애통해 했다. 특히 큰 증격을 받은 효현황후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까지 얻어 건륭 13년에 건륭제를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식을 잃
를 적어 황후에게 은 데다 황후까지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한탄하던 건륭제는 술비부애도의 뜻을 표했다.

건륭제는 일생 무수히 많은 여인들과 잠자리를 했다. 기록을 보면 비빈을 포함해서 철민황귀비
함로효부찰 씨, 혜현황귀비를밥물을로 고음 씨,숙가황귀비 김순 씨, 영귀비 진씨 등 모두 4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철황귀비 부찰 씨는씨, 완귀비독티효 파림과 황녀 둘을 낳았다. 숙가황귀비 김 씨는 황사자 영성과 황팔자 영선 황장자 영황
황구자, 황십일자를 낳았다. 그리하여 여든아홉 살까지 전수를 누린 건륭제 홍력은 아들 17명과 딸 10명으로 총 27명의 자녀를두었다. 그중에서 15명만이 성년으로 자랐고 나머지 12명은 모두 요절했다.
성년이 된 15명의 자녀들 중 그보다 먼저 죽은 자녀들이 10명이나 될 정도로 건륭제는 아주 오래
살았다. 건륭제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곁에 남아 있던 자녀들은 아들 네 명과 딸 한 명으로 겨우 다섯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