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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궁황후와 황제의 부부생활

후궁 전의 상징인 황후는 대부분 예법에 따라 황제인 남편을 대했다. 이것은 여색을 즐기고 싶어 하던

대부분의 황제들에게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고 또 어떤 황제들은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황제들과 황후들은 예법에 따라 격식을 갖출 뿐이었다. 우아하고 교양을 갖춘

황후들은 국모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동시에 보통 여인이 누려야 할 즐거움은 누리지 못했다. 즐거움과

활력이 넘치는 여자로서의 생활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비들에게 빼앗겼다. 총애를 받는

후비와 황후의 생활 모습은 완전히 달렸다. 후비들은 애교를 부릴 수도 있었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거리낌 없이 황제와 향락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었다.

후궁 전의 중심에 있던 황후는 실질적으로 후궁 전을 통 슬하는 지위를 가지는 동시에 특별한 상징적인

의미도 가졌다. 중국 고대 음양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부부의 도리를 매우 중시했다. 황후는 후궁 전에

주재하며 육 궁을 통 슬하고 황제를 내조하며 상징적으로 음양의 조화와 질서를 대표했다. 후궁 전에서 태

후 이외 가 모든 여성은 황후의 명에 복종해야 했다. 명절과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이면 화려한 옷 자림

을 한 황후는 엄숙한 모습으로 내정의 전당에 올라 후궁 전에 있는 모든 비빈들의 배알을 받았다. 황제와

태후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황후였기에 후궁 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황후에게 존경을 

표하며 엎드려 절해야 했다.

고대 농업 국가였던 중국에서 남성은 밭을 갈고 여성은 직물을 짜는 분업 생산의 원칙을 추구했다.

그래서 전국 여성의 대표였던 황후는 매년 봄마다 진잠 의식을 거행하며 모든 여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때문에 위엄 있는 후궁 전에서 황후의 지위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고 상징성을 가진 황후의 윤리적인

이미지 역시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모로서의 삶과 여자로서의 삶

엄밀히 말하면 황제 황후는 법으로 유지되는 사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과연 사랑이 존재했을까?

이것은 분명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다 황후마다 그들의 운명이 제각각 달랐으니 말이다. 똑같이 빛나는

황금 옥좌에 앉았던 황후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황후의 모습을 보여준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황후는

권력을 거머쥐었다.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황후가 있는가 하면 어떤 황후는 특별히 황제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태자 시절 결혼한 황제나 즉위한 후에 결혼한 황제 모두 그들의 첫 번째 부인인 본처는

일반적으로 그들이 직접 뽑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인 황제와 황후나 할머니인 황태후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중국의 대부분의 황제와 그들의 본처인 황후는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기

반 없이 결혼했던 것이다.

가장 존귀한 존재인 황제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간택된 황후를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흥미를 가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황제들은 부모나 집안 어른들을 존중하고 그 권력에 굴복하는 뜻에서 단지 예의상

정식으로 성년이 됨을 상징하는 대 혼례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황후로 선정된

여성들은 대부분

명문가 출신으로 복잡하면서도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심지어 황제와 혈연관계에 있던 친척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황후들이 반드시 출중한 외모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평범한 외모였고

보통 여성들보다 외모가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진혜 제품 봉해의 황후 가남 풍이

그 대표적인 예로,

그녀는 키가 작고 피부가 까말고 못생겼으며 질투도 심했다.

하지만 고귀한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황후들은 학식이나 예의범절 면에서는 보

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때문에 그녀들은 스스로 고귀하다고 여겼으며 심지어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황제를 받들며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여성적인

매력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애교 부리는 것을 자중했다. 이는 존귀한 국모인 황후의 신분에서는 당연한

자세 있나 황제가 보기에는 여성으로서 전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비빈들은 대개 궁녀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오며 출신 신분도 다양했다. 그녀들은 황제의 환심을 얻고

총애를 받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황제에게 더 깊은 사랑을 받으면 그녀들은 황후의 옥좌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다 결국 황후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황제는 예의상 황후를 존중했지만

애정을 주지는 않았다. 어떤 황후는 신혼기간 동안 황제와 끈끈한 사랑을 나누며 늘 함께 다니기도

했으나 행복한 나날도 얼마 가지 못하고 결국 쓸쓸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이처럼 이후 황제에게 총애를

잃은 황후는 폐위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오히려 황제의 총애를 한 번도 받지 못한 황후들은 폐위될 가능

성이 좀 더 적었는데, 이들을 존중하긴 했으나 예의를 지키며 거리를 두고 지낸 탓이었다.

최고의 위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황제는 황후가 싫어지면 그녀를 폐위시키고 다른 사람을

황후의 자리에 올릴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폐위된 황후의 이야기는 중국 역사서에 수없이 등장한다.

황제가 황후를 싫어하긴 했지만 끝까지 폐위시키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

다.

첫째, 성대한 책봉식을 가진 황후의 지위는 결코 쉽게 흔들릴 수 없었기에 황후를 폐위하는 것은 조정

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째, 황후를 폐위할 수 있는 근거로는 황후의 도덕적 결함밖에 없었다.

만약 황후가 질책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황후를 폐위시키기는 매우 어려웠다. 셋째, 단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황후는 황제의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황제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턱대고

황후의 폐위를 결정할 수 없었다. 넷째, 황후의 아들이 태자가 되면, 태자의 지위 로모 후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다섯째, 비록 황후에게 여성적인 매력은 없었지만 예법을 중시하는 황제로서 예법을

준수하는 여성이 황후로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요염한 비빈들이 황제에게 매력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그녀들이 황후 자리에 앉아 육 궁을 이끌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